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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발장, 홍세화 선생은 등대였다”…빈소 찾는 발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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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958회 작성일 24-04-20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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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 빈소에 조문객들이 방문해 애도를 표하고 있는 모습. 김영원 기자

진보 지식인 홍세화 빈소
정치권·시민사회 이틀째 조문
서울 신촌세브란스 장례식장



한국사회에 ‘똘레랑스’를 전했던 작가이자 언론인, 사회운동가인 고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 빈소에 일반시민과 옛 동료, 활동가, 정치인 등 다양한 이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1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안아무개(31)씨는 20대 때 장발장 은행 도움을 받았다. 장발장 은행은 벌금을 내지 못해 노역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 설립된 ‘은행’이다. 그는 “대학생 때 벌금 150만원을 내야 했는데 50만원을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다. 집이 가난해 부모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때 장발장 은행이 도움을 줬다”며 “선생님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그때의 은혜 덕분에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등대’라는 단어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책’으로 고인을 만났다는 이은주(51)씨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선생님을 알게 됐다. 90년대 한 간담회에서 뵀는데, 공부를 가장 많이 하셨지만, 냉철하면서도 감성적인 분이셨다. 사회를 너무 잘 알고 공감을 정말 많이 하셨던 분이 떠나 슬프다”고 말했다.

오랜 독자였다는 ㄱ(54)씨는 “사회에 쓴소리 할 수 있는 얼마 안되는 분인데, 그런 분들이 점점 사라지는 게 너무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고인과 가까운 인연을 맺었던 이들의 조문 행렬도 이어졌다. 심기용(29)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상근활동가는 “과거 성소수자 지지 인터뷰를 해주신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됐다”며 “이 시대에 존경할 수 있는 얼마 남지 않은 진보 지식인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큰 길이 하나 사라진 거 같아서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고인의 후배인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는 “늘 ‘빚지고 있다’는 마음가짐을 지녔고, 그래서 겸손하셨다. 베스트셀러 책 덕분에 인세로 50억원을 벌었지만 그 많은 돈을 운동하는 이들에게 다 후원금으로 나눠주셨다”며 “갖고 있는 걸로 늘 빚 갚는 삶을 사셨다. 약자에게 치우친 분, 편파적인 분, 언제나 가장 낮은 자리에 계셨던 분이다”라고 말했다.

고교·대학 동문인 이필한(75)씨는 “세화는 우익에 반대하는 진보가 아니라 진짜 사상을 위해서 진보했던, ‘진짜 진보’였다”라고 회상했다.

고인과 인연이 있던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도 이날 오전 빈소를 찾았다. 고인의 고등학교·대학교 선배인 그는 고인이 처음 해외주재원으로 나갈 때 공무원 신분으로 신원보증을 서줘 남민전 사건 이후 경찰조사를 받기도 했다.

고인과 서울대학교 문리대 동창인 유인태 전 의원은 “1960년대 위수령이 발동돼 군인들이 교문을 가로막고 우리는 학교에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그 시절 세화가 모임에서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라고 시작하는 박건의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을 불렀다“며 “대부분 처음 듣는 곡이었는데, 마로니에가 피는 학교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서글픈 현실을 너무 잘 표현해 다들 잊지 못했다. 세화 때문에 그 노래가 점점 알려져 나중엔 문리대 교가가 되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장발장은행에서 대출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민갑룡 전 경찰청장은 “지원여부를 놓고 심사위원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질 때면 늘 가급적 모두를 지원하고 싶어하셨다”며 “사회가 따뜻한 모습일 때 누구든 선한 길로 돌아올 것이라고, 사람의 가능성을 믿으셨던 분”이라고 추모했다.

장혜영 녹색정의당 원내대표 직무대행은 “시대의 어른들이 자꾸 떠나셔서, 저희한테 빨리 어른이 되라고 그러시는 건가 싶다. 새로운 시대를 우리가 아직 열지 못했는데, 기둥같은 분들이 자꾸 떠나시는 현실이 너무 황망하다”고 말했다.

엄길용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위원장은 “노동조합 간부들이 해결책을 논의할 때 우리의 해결책은 항상 단결하고 투쟁하는 거였다. 고인은 다양한 해결책에 대한 열린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많은 얘기를 해줬다. 그 점이 그리울 것 같다”고 말했다. 김찬휘 녹색정의당 공동대표도 “선생님을 하나의 단체, 당적, 활동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다채로운 관심에 대한 선생님의 자세, 모습을 우리가 모두 기억해야 한다”며 “홍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쓴 글은 ‘겸손’이라는 단어다. 그분이 후세에 남기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한다”고 말했다.

빈소 안에는 고인이 한겨레신문에 써왔던 칼럼과 2001년 2월 한겨레21에 기고한 미리 쓴 유언장도 전시됐다. 조문객들은 고인이 생전 글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발길을 돌렸다.

전날 저녁에도 많은 이들이 빈소를 찾았다. 양경규 녹색정의당 의원은 “원칙이 분명했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던 분”이라며 “힘들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을 가는 게 맞는다고 얘기하셨던 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진중권 정치평론가는 울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외 심상정·강민정·박용진 의원,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 유홍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노혜경 시인, 정운찬 전 국무총리, 박수빈 서울시의원, 김민섭 작가, 이태호 참여연대 위원장,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 이종회 전 노동당 대표, 김중배 뉴스타파함께재단 이사장, 이수호 전 전교조위원장,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이사,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등이 조문했다.

고인은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1979년 고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장기간 망명 생활을 하며 쓴 에세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출간해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2002년 귀국해 그해 2월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했고, 기획위원과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저술·논평 활동을 하며 똘레랑스(관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2015년부터 장발장 은행 은행장을 맡았다.

고인은 지난해 2월 암 진단을 받고도 항암치료를 하지 않고 활동을 계속했다. 12월께부터 암이 온몸으로 번졌고, 경기 일산 국립암센터와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아왔다. 장례는 오는 21일까지 한겨레신문사 사우장으로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러진다. 오는 20일 오후 6시부터는 신촌 세브란스병원 1층 영결식장에서 시민사회단체들이 추모제를 열 예정이다. 영결식 및 발인은 21일 오전 8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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