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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마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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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20회 작성일 19-08-18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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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뒤마를 손에 쥐었다. 묵직하고 두툼한 질감, 연초록의 석재와 흑갈색 레진의 낯선 결합이 주는 차가운 생경함. 1996년에 출시된 몽블랑 작가 시리즈 알렉상드르 뒤마는 나를 순식간에 30년 전의 시간으로 돌려놓았다.
순이는 혼혈이었다. 아빠는 독일인, 엄마는 한인간호사로 쾰른 근교에 살았다. 르누아르가 그린 <책 읽는 소녀>와 옆얼굴의 부드러운 곡선이 닮은 순이는 나를 옹켈이라고 불렀다. ‘옹켈’은 독일어로 삼촌이라는 뜻이다. 그냥 아저씨라는 친근한 뜻으로 부르기도 한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옹켈. 내일 아침 일찍 말 목장에 산책 갈까?”
다섯 살 순이는 목말 타기를 좋아했다. 꽃잎처럼 가벼운 몸을 번쩍 들어서 어깨 위에 목말을 태우면 순이는 두 다리를 구부려서 내 겨드랑이에 바짝 끼우고는 두 손으로 내 귀를 붙잡았다. 조약돌 같은 손으로 내 양쪽 귀를 꽉 쥐고는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앞으로! 멈춰! 등의 명령을 내릴라치면 나는 어깨에 걸터앉은 꼬맹이 주인님의 명령에 유순하게 복종하는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서 기계로봇처럼 명령을 수행해야 했다. 목말을 태운 채 나지막한 구릉을 두어 개 넘어가면 낡은 목책을 두른 말 목장이 나왔다. 호주머니에 넣어온 사과를 말들이 먹는 동안 우리는 말의 콧구멍이 S자 모양으로 꼬부라진 것을 보면서 깔깔댔다. 어떤 말은 우리가 저를 놀리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푸르릉거렸다. 그럴 때면 말의 입김에서 사과 냄새가 났다.
쾰른에서 미술사와 고고학을 공부하느라 12년이나 걸렸다. 천성이 굼떠서 남들보다 공부가 오래 걸렸다. 쾰른대학식당 지나서 췰피허 슈트라세 교차로에서 전철을 기다리다가 순이를 우연히 만났다. 순이도 알아보고는 크게 웃음을 지으며 달려왔다. 파도가 부서지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거의 10년 만에 숙녀가 다 된 모습을 보니 반갑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손은 잡았지만 딱히 나눌 말이 없었다. 순이는 혼자서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엄마가 요즘 잔소리꾼이 다되었다는 둥, 남자친구 베르너가 자꾸 밉살스럽게 군다는 둥 실없는 수다를 늘어놓았다. 재잘대는 말을 건성으로 흘려들으며 순이의 얼굴을 살폈다. 순이는 속눈썹이 더 길어졌고 입술도 붉어져 있었다.
이듬 해 박사논문과 구술시험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침 여윳돈이 생겨서 사고 싶은 책도 주문하고 도서관에서 빌린 논문을 복사하고 제본하면서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영화도 실컷 보았다. 영화 <연인>도 그때 보았다. 프랑스 영화의 원제가 프랑스에서는 L'amant인데, 독일에서는 Meine kleine Konkubine라는 제목이었다. ‘나의 어린 애첩’이란 뜻이다.
지난 해였다. 서울시청 근처에서 페리 여행사를 경영하는 순이 이모로부터 연락이 왔다. 순이 이모와는 쾰른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순이가 서울에 왔는데 만나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문득 독일을 떠나오기 전, 순이와 나누었던 전화통화가 떠올랐다. 수화기를 들고 영화 <연인>의 감상평을 한참동안 이야기했었다.

“열다섯에 인생을 알아버린 한 프랑스 소녀의 이야기야. 베트남에 간척사업을 벌이던 아빠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가신 뒤에 소녀가장이 된 꼬마 숙녀는 우연히 노총각 중국인 부호 2세를 만나게 되지. 미숙한 몸과 성급한 영혼으로 아프게 사랑하고 결국 연인과 헤어지는 내용이지. 연인들이 마지막 사랑의 축제를 마친 뒤에 남자는 슬픈 눈으로 소녀를 보면서 이렇게 말해.
‘넌 내일 뒤마와 함께 떠나겠지...’”
수화기 뒤에서 순이가 말했다.
“그런데 뒤마와 함께 떠난다는 게 무슨 뜻이야?”
“들어봐. 영화의 다음 장면에서 갑자기 거대한 고동소리가 뿌웅 울리면서 항구에 정박한 흰색 대형 페리가 모습을 드러내. 카메라는 짐을 들고 분주히 배에 오르는 사람들을 잠시 스치다가 이윽고 뱃머리를 보여주는데 거기에 ‘알렉상드르 뒤마’라고 적혀 있어. 그러니까 소녀가 뒤마 호를 타고 프랑스로 돌아간다는 뜻이겠지.”
그러자 순이가 물었다.
“삼총사를 쓴 알렉상드르 뒤마?”
말끝에 생기가 묻어났다.
“근데 옹켈. 혹시 뒤마가 흑인 혼혈이란 것 알아?”
“정말?”
“뒤마 할아버지가 아이티 흑인노예와 사이에 아이를 넷 두었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을 입양해서 프랑스에 데리고 왔대. 그러니까 뒤마의 아빠겠지. 뒤마의 아빠는 나폴레옹의 유능한 장교로 전투에서 공을 많이 세웠다고 들었어.”
“그랬구나. 순이가 아는 게 참 많구나...”
이런 이야기가 오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청역 5번 출구에서 만난 순이와 순이 이모는 배가 많이 고프다고 했다. 나란히 무교동 코오롱빌딩 맞은편 곰국시집까지 걸어갔다. 마늘과 고춧가루를 많이 넣고 얼큰하게 끓인 국수전골을 먹으면서 셋이 같이 땀을 흘렸다.
다섯 살 꼬맹이는 이제 서른 중반의 육중한 독일아줌마가 되었다. 혼혈 티는 안 났다. 서른 살 청명했던 유학생이던 나도 곧 환갑을 바라본다. 지금껏 순이와 나는 세 번 만난 셈이다. 더 이상 목말을 태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 만나니 이제 인생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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