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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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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우량 댓글 0건 조회 538회 작성일 20-01-07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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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둘이 대학생입니다. 가끔 집에서 학교 과제를 하다가 이것저것 묻곤 합니다. 몰라서 묻기도 하고, 알면서 제 애비의 ‘신지식’ 수준을 점검하기 위해 묻기도 합니다. 한 마디 대답으로 끝날 때도 있고, 1시간 넘는 토론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 내용이 녀석들의 과제물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는 모르나, 도움이 되기는 할 겁니다. 전공은 다르지만 나름대로 ‘신지식’에 관심 있는 애비를 둔 덕이겠죠. 그런데 이번에 언론을 통해 검찰의 조국 교수에 대한 공소장 내용을 접하고서야, 이게 ‘범죄’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 자식들은 자기 배경을 악용하여, 학교의 성적 처리 업무를 방해하는 범죄를 저지른 셈입니다.

집에 프린터가 한 대뿐입니다. 아들 녀석들이 과제물을 제게 메일로 보내면, 제가 다운받아 출력해 줍니다. 당연히 제 PC에는 아들 녀석들의 과제물 파일이 여럿 들어 있습니다. 검찰에게 밉보이면 이 파일들이 ‘업무 방해죄’의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선배에게 시험 문제 족보를 얻는 행위, 학점 좋은 친구 노트를 복사하여 그걸로 공부하는 행위, 친한 동료들끼리만 모여 함께 시험 준비하거나 보고서 작성하는 행위 등이 모두 넓게 보면 ‘성적을 높이기 위해 인맥을 동원하는 행위’에 속합니다. 검찰과 언론, 일부 지식인의 주장대로라면 이런 행위들이 전부 ‘범죄’가 됩니다. 세밀히 따지면, ‘불공평’하다는 비난을 받을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아직 이런 종류의 ‘불공평’을 극복할 방도를 찾지 못했습니다.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유지되는 한, 부모의 문화적 취향, 지식수준, 심지어 음식에 대한 기호까지도 자식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걸 ‘문화자본’이라고 합니다. 급진주의자라면,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문화자본’의 영향을 원천적으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먼저 고액 과외, 해외 유학이나 연수, 입시 컨설팅, 나아가 각 가정의 도서 구입비나 공부방의 크기 등 학업에 영향을 미치는 ‘자본’ 그 자체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주장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이거야말로 검찰총장이 신년사에서 강조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를 근본에서 부정하는 일입니다.

유럽적 또는 근대적 관점에서는, 집 안의 일이 private(私), 집 밖의 일이 public(公)입니다. 가정 내에서 어떤 대화가 오가든, 어떤 토론이 이루어지든, 어떤 협업이 진행되든, 구성원의 신체와 존엄성에 위해가 가지 않는 한 국가나 공공이 간섭하지 않는 것이 ‘공사 구분’입니다. 한국 언론은 조지워싱턴대 교수의 입을 빌어 “교수 승인 없이 무단으로 협업하는 것은 학칙 위반”이라며 검찰의 편을 들지만, 미국의 어떤 교수도 ‘부모가 학생에게 도움을 주었는지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가족 간 사적 메시지를 조사하는 나라’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설령 조국 교수가 자녀 시험을 도와준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보다 훨씬 더 중대하고 심각한 죄가 검찰의 ‘사생활 침해죄’입니다. 한국 언론들이 즐겨 인용하는 미국 언론이라면, ‘부모가 집에서 자녀 시험을 도와줬는지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가족 내의 사사로운 메시지를 조사한 행위’ 자체를 ‘국가의 근본을 흔든 중대 범죄’로 취급했을 겁니다.

검찰이 조국 교수 공소장에 조지워싱턴대의 업무를 방해했다는 혐의를 끼워 넣은 것은, 공사 구분의 원칙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운영 원리를 공격했다는 점에서 ’원시적‘이며 ’야만적‘입니다. 자기들에게 위협이 될 것 같은 사람이 있으면 사생활 전반을 샅샅이 뒤져 어떤 죄목을 씌워서든 처형했던 자들이, ’원시적 야만‘의 대표들이었습니다. 21세기 한국 사회의 핵심부에 ’원시적 야만‘이 자리 잡고 있는 데도, 언론과 일부 지식인이 그들을 비판하긴커녕 두둔하는 건, 정말 끔찍하고도 참담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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