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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셔 외무장관의 과거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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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4회 작성일 19-06-05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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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셔 외무장관의 과거행적 

과거 행적이 문제가 된 외무장관 피셔


 프랑크푸르트에는 요즘 많은 시민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재판이 열리고 있다. 관심의 주인공은 70년대 초 학생운동권 의 주모자 역할을 했던 3명의 인사들이다. 피고인은 70년대 Opec 회의장을 습격, 3명을 살해한 적군파테러 단원이었던 현재 58세의 클라인(Klein)이다. 그러나 실은 이보다 더 관심의 대상이 된 인물은 재판정에 나온 두 명의 증인이다. 한 사람은 당시 프랑스와 독일을 왕래하면서 운동권에서 중심역할을 했고 현재는 유럽연합의회 의원인 콘 벤디트(Cohn-Bendit)이며 또한 사람은 현재 독일 외무장관 피셔(Fischer). 이들 세명은 70년대초 프랑크푸르트 시내에서 매일 경찰과 치열한 투석전을 벌릴 당시의 한생운동권 동지였다.
K는 그 후 운동권에서 자취를 감추고 지하로 잠적하여 과격한 적군 파 테러단에 가담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수년전 테러집단으로부터 이탈하면서 적군파의 보복이 두려워 도피생활을 해왔는데 이 기간동안을 콘 벤디트가 재정적 지원과 프랑스내의 은신처를 물색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다. 이 범인 은닉죄목으로 그가 1년 이상의 형을 받으면 유럽의회 의원적도 박탈당하게 된다.
 70년대 운동권의 한가지 전략은 ‘기성제도권으로 의 행진’(Marsch durch  die Institutionen)을 통해 사회변혁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일부는 직접 공장으로 뛰어들기도 했으나 배부른 서독 노동자들이 배를 조려야 하는 사회주의 체제에 매력을 느낄 리가 없었다. 이들은 모두 좌절감을 안고 공장을 떠났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노동현장과 농촌현장에서 뚜렷한 성과가 있었다). 콘 벤디트와 피셔는 ‘기성제도권’에 파고 들어가 자기 노선을 실천에 옮겨보겠다는 현실적인 전략을 성공적으로 실현해낸 대표적인 성공 케이스에 속한다. 이들은 이제 유럽의 녹색 운동을 주름잡는 인물이 되었다. 진스 바지와 운동화를 신고 국회에 등단했던 초기 피셔가 이제는 최고 멋쟁이 맞춤 양복을 입고 국민들로부터 최고 인기를 독차지하는 정치인으로 탈바꿈함으로써 이제 그는 완전한 이미지 쇄신에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이번 재판에서 증언대에 서게 되면서 피셔의 과거 학생운동이 문제가 되었다. 일부 언론사에서 당시 경찰관을 폭행하는 장면을 담은 필름이 새로이 공개되면서 독일정계에서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책임문제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야당에서는 당시 좌파들이 경찰관에 대한 폭행과 요즘 나치 파들의 외국인에 대한 폭력이 서로 다를 바가 없다는 억지주장도 내놓고 있다. 단순히 폭력이라는 사실만을 놓고 본다면 이런 주장도 나올 만 하지만 이는 서로 차원이 다른 두 문제를 그 겉모습만으로 비교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피셔는 이번 기회에 자기의 과거 행동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하지만 기민 당에서는 과거의 폭력행위자가 일국의 외무장관이라는 중책을 맡을 수 있겠는가라는 점에서 그의 도의적 책임을 따지고 있다. 무엇보다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면서 길에 쓰러진 경찰관을 구타했다는 사실도 비난의 초점이 된다. 그러나 피셔는 자기가 일관되게 화염병 사용이나 과격한 폭력행위를 거부해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하여간 이런 논쟁을 보면 독일에서는 과거 피셔의 사상이 문제시 되어 있지 않다. 사상의 자유는 최대한 용납되는 것이다. 단지 그가 폭력을 찬양하고 더욱이 직접 폭력을 행사했는가 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도덕적 내지는 법적 책임을 묻고 있다.

68세대는 전향자의 세대?

 사실상 정치권에서 자기의 정치이념에 변화를 가져오는 소위 전향(Renegation)은 드문 일이 아니다. 독일 정계에서는 2차대전 당시 소련에서 독일공산당의 요직을 맡고 있던 중 노선을 바꾸어 전후 독일 사민당(SPD)에 가입하여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이끌어 나가는 데 큰 공을 세운 원내총무 Herbert Wehner 가 특기할만한 존재이다.

1967년부터 수년간 격렬했던 학생운동의 주동역할을 소위 ‘68세대’를 보면 이제 이들은 모두가 독일사회에 융합되어 정계, 언론 등 각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향자의 세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그들은 당시의 과격한 성향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피셔뿐 아니라 슈뢰더 수상도 역시 학생시절에 학생운동의 선봉 대원이었다. 당시 그가 국회의사당에 침입하려고 잠긴 문을 뒤흔드는 장면은 요즘에는 슈뢰더 자신에게마저도 웃음꺼리가 되는 유명한 사진으로 남아있다.
 심지어는 좌파로 오랜 옥살이를 하고 난 후 180도 급전환하여 현재는 나치들의 브레인역할을 하는 변호사도 있다. 콘 벤디트 역시 유럽통합이나 유로하도입에 대해 호의적이라는 이유로 신자유주의자 내지 심지어는 파시스트라는 공격을 받기도 한다.
 사실 독일 과격좌파들의 경직성은 코소보 전쟁을 놓고 가시화된 셈인데 여기서 그들은 피셔나 콘 벤디트같은 현실주의자들과는 뚜렷이 의견 차이를 드러낸 것이다. 즉 이들은 ‘다시는 독일군대를 전쟁터에 보내지 않는다’는 원칙론에 매달려 전쟁개입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유럽권내에서 나치에 못지않은 잔인한 인종학살을 자행하는 정권을 견제하는 데 있어 이념적인 아집은 아무런 의의가 없다는 것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생명과 존엄에 관계되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편협한 입장을 취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때 콘 벤디트나 피셔는 지상군파병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일부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녹색 당은 ‘좌측으로 떠벌이고 우측으로 생활하는 집단’이라고 통틀어 혹평을 가하는 한 사민당원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도 한다.
 피셔가 전향자라는 비난을 받은 것은 이미70년대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극좌파 이론지에 투고한 기사에서 앞으로 다가올 혁명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이 할 수 있는 중심적 역할을 의문시했다는 이유로 동지들이 피해 다니는 정도로 비판을 당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70년대 서독의 상황이나 통일을 전후한 동독의 사회상을 돌이켜볼 때 오히려 그에게는 예언가적인 혜안이 주목할 만하겠다
 얘기를 바꿔서 원래 공산정권이 들어서면 구 정권추종자들을 대상으로 재교육을 통한 전향사업(Umerziehung)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동독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2차대전 후 그들도 대대적인 ‘변절사업’을 시행했다. 즉 나치당원이면서 큰 죄를 저지르지 않은 추종자들을 대상으로 ‘공산주의자 양성 속성코스’를 도입한 것이다.
 파시즘이 성취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질서를 공산정권이 이룩하겠다는 것이 이 속성코스의 기본 논조였다. 요즘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50년경 동독정부 산하기구임원의 거의 20%가 이렇게 속성코스를 거쳐 전향한전 나치 당원이었다고 한다.

68운동의 이론적 배경이 된 ‘프랑크푸르트 학파’
 (Frankfurter Schule)

 여기서 피셔가 활동하던 소위 ‘68 운동’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68년부터 전 세계적으로 번져갔던 이 유럽학생운동은 독일의 과거역사. 경직된 사회의 관례 등 전통적 가치관, 특히 나치시대의 정신적 유산에 대한 폭발적인 저항운동이었다.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몇 가지 국내적인 사건이 있기는 했으나 역시 68운동의 이념적 지도자로는 2차 대전 전 프랑크푸르트 사회문제연구소에 종사하던 중 나치정권을 피해 미국 캘리포니아로 망명한 마르쿠제였다(한국 내에서는 「이성과 혁명」이라는 책을 통하여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를 중심으로 한 이 연구소의 주요연구 과제는 권위주의문제, 이데올로기비판 등이었는데 이것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회비판이론으로 불리고 있다. 산업사회에서 야기되는 사회적 병폐를 파헤치면서 자유가 보장되고 인간해방이 실현된 이상사회에 대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관심이 학생, 지식인층에 영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60년대 말의 이 학생운동은 독일 여러 곳의 대도시에서 뿐 아니라 미국, 프랑스 등에서도 동시에 폭발적으로 격렬하게 일어났다. 대학내부의 제도적인 문제에 대한 반항도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프랑크푸르트의 경우에는 일반 서민들에게는 주거사정이 여의치 않은데도 불구하고 일부 부유층 부동산소유자들이 집을 비워놓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대학근방의 이 가옥들을 무단 점거하였고 여기에 맞서 가옥소유주들은 경찰을 동원해서 법에 의해 강제철거를 시도했다. 여기서 학생과 경찰사이에는 연일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격렬한 대치상황이 벌어졌다. 점거된(besetzt) 가옥의 창문에는 학생들이 내건 슬로건이 늘 휘날리고 있었다. 그 밖에도 갖가지 계기가 있을 때마다 데모가 벌어졌는데 피셔와 콘 벤디트는 이 때 학생층을 대표하는 지도층의 일원이었다. 특히 콘 벤디트는 국경을 넘나들면서 프랑스의 학생운동을 초기부터 이끌어온 인물이다 ( ‘68운동의 회고와 의의’에 관한 기사는 본 지 98년 10월호 게재했음). 성공적으로 자기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시켜 나가고 있는 두 명의 정치인과 과격한 극단주의 노선에서 뒤늦게 벗어나려고 하는 피의자의 입장에 서있는 세 명의 옛 동지들의 서로 엇갈린 운명이 시민들의 관심과 흥미꺼리가 되고 있다. 콘 벤디트는 그 자리에서 착잡한 심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증언대에서 감회에 젖은 눈물을 터뜨려서 더욱 매스컴의 주목을 집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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